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고르바초프 (문단 편집) === 페레스트로이카 === 고르바초프 개혁의 원본 노선은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였던 소련과 중앙/동유럽을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이였다. [[소련 공산당]] 역시 이전 프라하의 봄 당시 추진되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와 비슷하게, 공산당 내부에서 [[민주주의]] 요소를 강화해 정치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순수 계획경제에서 혼합경제로 이전, 복지나 사회보장제도는 전과 비슷하게 하고 기업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브레즈네프 이래로 만연했던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그는 전반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북유럽식 사민주의 체제로 전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개혁정책은 여러가지 문제를 촉발시켰다.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계획경제와 과도한 국방비 지출에 따른 경제 침체를 탈피하고자 시장경제 도입을 추진했고, 1990년에는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기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다당제와 의회 제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정치체제의 개혁도 시도하였다. 그러나 시장경제 도입은 침체돼 있던 경제를 오히려 더욱더 [[막장]]으로 몰아갔다. 수십 년간 공산당 지시로 결정되던 상품 가격을 갑자기 수요-공급에 따른 시장 자율 가격으로 대체하니 혼란이 닥쳤던 것이다. 사실 이전, 그러니까 브레즈네프 집권 이전에도 [[코시긴]]이 비슷한 경제개혁을 추진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는 이와 비슷한 폭망이었다. 즉 계획경제에서 갑자기 자율성과 경쟁체제를 도입한 결과는 굉장히 파멸적이었다. 원래 의도는 보조금을 줄이고 고급 상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일을 줄이는 것이었지만, 막상 경영 자율화를 시켰더니 국영기업들이 국영상점에 싼값에 내놓아야 할 물건을 암시장에 몇배 이상의 가격으로 비싸게 팔면서 수십년간 (강제적으로) 안정화시켜 놓았던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유통체계가 난잡해지면서 이전에 줄을 서지 않아도 될 상품을 (값싸게) 사기 위해서 줄을 서야 했으며 줄을 서지 않으려면 시장에서 바가지를 써서 상품을 구해야했다. 또한 물가상승분을 벌충하기 위해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는데 통화량 증대로 은행에 예금은 넘쳐났고, 구매력도 크게 올랐지만 막상 돈이 넘쳐나는 상황 속에서도 생산 부문 투자는 그에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줄은 더욱 길어지고 지하경제는 더욱 융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전에는 물자부족 문제가 주로 소도시에 집중된 문제였기 때문에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키이우, 민스크 등의 주요 대도시 지역으로 가면 생필품이나 물자들을 값싸게 구할수 있었지만, 고르바초프 중후반기 들어서는 대도시에서 조차도 값싸게 물자를 구하기 힘들어져서 시장에서 비싼 돈을 주거나 줄을 길게 서야 했으며, 고르바초프 후반기에는 배급제가 다시 실시되는 등 계획경제체제의 마비가 뚜렷해지자, 생활경제는 점차 악화되었다. 처음부터 경제개혁이 효과가 없던 것은 아니라서 1988년에 일시적으로 경제성장률이 5.5%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동구권 및 코메콘 붕괴를 기점으로 다시 침체기로 접어들었고 1990년에 [[대조국전쟁]] 이래 최초로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또한 경제 불안정과 더불어 [[소련 루블]]의 암시장 환율은 급속히 상승했다. 또한 [[글라스노스트]]로 확대된 언론의 자유는 기존 소련 체제 내부의 문제점들을 좀더 투명하게 드러내서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오히려 체제 개선보다는 그동안 억눌려 있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창구로 기능하면서 소련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글라스노스트를 계기로 그동안 소련이 억눌러 왔던 다양한 정치적 요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소련 공산당은 날로 증가하는 인민들의 개혁요구를 수용하는데 벅차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 이전 소련 정치인들이 바보라서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소련은 국가 특성상 매우 복잡하고 많은 다민족들이 얽힌 나라고, 특히 소련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어 소련 체제에 대한 반감이 큰 발트 3국이나 캅카스 3국 등의 경우 소련에서의 독립을 노렸다. 즉 소련 체제 특성상 언론의 자유 보장과 정치적 자유 허용이 소련 해체로 연결될 것을 두려워했다. 어찌보면 고르바초프가 너무 순진했다고 할수도 있다.] 실제로 고르바초프의 지방선거와 지방자치 허용 이후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등의 공화국들에서는 독립파가 무더기로 공화국 최고회의에 진출하여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는 계기를 마련하는가 하면, 연방 구성국들의 독립이 임박하자 [[중앙아시아]]와 [[캅카스]]에서도 [[나고르노-카라바흐]]나 [[남오세티아]], [[압하지아]] 및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에서 주류민족과 소수민족 사이 유혈사태를 동반한 민족갈등이 발생했다. [youtube(JUoZqAGqhzI)] 결국 1991년 고르바초프는 날로 팽창하는 지하경제와 높아져 가는 물가상승률을 잡으려고 1991년 1월에 50루블과 100루블권 지폐를 무효화하는 방식의 화폐개혁을 시행했다. 하지만 사전에 화폐개혁 정보를 입수한 당간부 등 [[노멘클라투라]] 계층은 미리 대비책을 마련한 뒤라 실질적인 효과는 크지 않았다. 여기에 뒤이은 1991년 [[8월 쿠데타]]로 고르바초프는 허수아비가 되고 각 산하 공화국들은 세금을 중앙정부로 납부하지 않고, 각 공화국별로 연계가 되었던 산업시설간의 연계도 끊어지기 시작하며 생필품 공급이 급속히 줄기 시작하며 소련의 경제는 마비되었다. 고르바초프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당시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이 시민의 저항을 이끌어내면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해체 및 민주 국가로의 소련 개헌이라는 마지막 연방 유지 방안을 제시하나, 결국 소련은 1991년 12월 해체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